•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었던 한국현대조각의 거장"

    우성 김종영 (1915~1982)

    우성又誠 김종영 金鐘瑛, KIM CHONG YUNG

    우성 又誠 김종영(1915-1982)은 ‘서화에서 미술로 전환기’에 새로운 것을 쫓기에 혈안이 된 세태와 등지고 시대의 과업인 동양과 서양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서양미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성취하였다. 그가 소명의식을 갖고 시대의 과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가학 家學으로 익힌 한학 漢學과 함께 선비라 불린 선생의 고결한 성품에서 비롯되었다. 서두름이란 일절 없었고, 동양과 서양의 미술을 꿰뚫어 살폈다.

    김종영이기에 시공을 초월해 완당과 세잔느를 비교해서 인류 보편의 진정한 예술가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리는 이의 뜻을 중시한 선비들의 그림 그리는 전통과 서양미술의 추상미술을 동격으로 살펴 작가의 뜻을 중히 여기고,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불각 不刻의 미’라는 이십 세기 한국 미술사에 길이 남을 예술론을 완성하고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한국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진정한 선각자였다.

    감종영은 무심한 돌덩어리와 나무토막에서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엄숙한 ‘美의 수도자’였다. 그에게 삶은 곧 예술이었고, 예술은 곧 삶이었다. 그의 아호 又誠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는 일생을 ‘성실하고 또 성실’하게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여전히 서양미술을 추종하고,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현 세태를 보노라면 김종영의 삶과 예술의 지향점은 우리도 깊이 간직해야 할 바이다. 그를 살피고 또 살펴야 할 이유다.

  • 1915-1935 출생-21세

    우성 김종영은 1915년 6월 26일 경남 창원에서 명망 있는 영남 사대부 가문인 김해 김씨 22대 손 성재 誠齋 김기호 金基縞와 이정실 李井實 의 오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히 그의 7대조는 무오사화(1498 연산군 4년)에 사초로 화를 입은 탁영 濯纓 김일손 金馹孫이다.

    부친 김기호는 시서화에 능통했던 선비여서 김종영은 5살부터 가풍에 따라 부친으로부터 전통 사대부 선비가 갖춰야 할 소양 교육을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30년 김종영은 서울 휘문고보로 유학을 떠났다. 부친은 서울 유학 중인 아들에게 편지로 선비로서 갖춰야 할 예의범절과 서예를 세심히 지도 편달할 만큼 자상했다.

    그 결과 휘문고보 2학년인 1932년 김종영은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학생작품전람회 서예 부문에서 안진경체로 쓴 「원정비 元靖碑」로 중등부 장원을 했다. 그의 서예 실력이 얼마나 출중했으면, 당시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을 보고 중학생의 실력이라기에 도저히 믿기지 않아 그보고 자신들 앞에서 직접 써보라 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는 동아일보와 가진 수상기념 인터뷰에서 어려서부터 부친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필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했다.

    김종영은 휘문고보에서 해방 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건립에 이바지했으며 학장도 역임했던 우석 雨石 장발 張勃과 만나 미술가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은사 장발의 권유와 부친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936년 김종영은 휘문고보 졸업과 함께 동경미술학교 조각과 소조부로 유학을 떠났다.

  • 1936-1947 22세-33세

    동경미술학교 재학 중 김종영은 로댕 이전의 서양 조각처럼 사실적으로 인체를 재현하기에 여념이 없는 학교 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개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조각의 보편적인 형식에 관심을 가졌고, 입체와 구조에 대한 논리적 추구에서 조각의 미를 찾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학교 수업보다는 메스트로보비치, 마이욜, 부르델, 콜베, 아르키펭코, 데스피오 같은 서양 조각가들의 작품집을 사서 즐겨 감상했다. 사진으로나마 그는 조각이란 인체를 만드는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예술로서 고유한 경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런 연유로 훗날 그의 작품에서는 일절 왜색 倭色을 찾아볼 수 없다.

    김종영은 1941년 동경미술학교 졸업 후 귀국해서 그해 12월 8일 이효영과 결혼했다. 그리고 1948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부장인 은사 장발의 부름으로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기까지 7년간 고향 창원에 칩거했으며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구장이라 하여 지금으로 치면 시골 이장과 같은 일을 했다. 그는 동네 농민들에게 고등 채소를 심도록 권장했고, 스스로 농사일을 즐겼다. 그 예로 그는 당시 일본에서 단감나무를 가져와 생가에 심기도 했다. 우연인지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이 바로 그의 고향에서 지척이다.

  • 1948-1963 34세-49세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의 미군정청 산하 서울시 학무국장에 장발이 취임했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됐다. 그는 조소과 교수로 휘문고보 제자인 윤승욱을 영입한 후 두 해가 지나 창원에 머물던 김종영을 서울로 불렀다. 그러나 1950년 6·25 동란 중 윤승욱이 실종되어 김종영이 조소과를 한동안 홀로 지도하게 되었다. 그 후 김종영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1세대 교수로서 1980년 정년퇴임 때까지 32년간 후학을 지도하며 우리나라 조각 예술 교육의 초석을 다지는 데 이바지했다.

    김종영은 1953년 5월 6·25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런던에서 개최된 『무명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라는 제하의 국제조각 콩쿠르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입상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한국미술이 세계 속의 한국미술이 되게 분투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그 결과 그는 추상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그해 12월에 개최된 제2회 국전에 드디어 그는 한국 최초의 추상 조각 작품인 『새』를 출품했다.

    김종영은 한국미술이 보편성에 기반한 특수성을 획득해야만 세계 속의 한국미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는 동·서 미술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비교해서 살핀 후, 이를 보완하기 위한 혼융이 필요한데, 이는 절대적으로 일정한 수련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그는 이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서구 추상미술의 태동부터 그 전개 과정을 대학노트 한 권에 손수 정리하며 살폈다. 특히 어려서부터 몸에 밴 서예 공부법인 ‘임서 臨書’를 하듯 서구 작가 작품을 세심히 따라 그리고 제작해보며 몸소 체험했다. 그 과정에서 개최한 전시가 1959년 국립공보관에서 월전 장우성과 함께 개최한 2인전이다. 이 전시에 출품한 조각 작품 8점은 인체부터 추상작품까지 실로 다양했다.

    김종영은 장우성과의 2인전에 출품했던 조각 작품 8점 가운데 철조작품은 창원 생가 별채 사미루 四美樓의 솟을대문을 연상시키는 『전설』을 포함해서 3점 출품했다. 이후 그는 철조작품은 제작하지 않고 돌과 나무를 깎는 데 전념했다. 그는 작품 『전설』로 1960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김종영은 공공기념조형물로 1957년 『포항전몰학도충혼탑』과 1963년 『삼일독립선언기념탑』 단 두 점만을 제작하였다. 두 점 모두는 온 국민이 진정으로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정성 어린 성금으로 건립한 공공기념조형물이다. 이후 그는 일절 국가에서 주도한 기념조형물을 제작하지 않았다.

  • 1964-1972 46세-58세

    김종영은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을 제작한 후 약간의 여유가 생긴 덕에 1963년 서울대학교 관사에서 삼선교 언덕 위에 작은 마당이 있는 아담한 양옥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64년 우리나라 나이로 지천명 知天命, 그러니까 하늘의 뜻을 안다는 50이 된 그는 새해 첫날 그동안의 실험을 종합해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작업에 전념하겠다는 다짐을 일기에 적었고 온전히 그렇게 했다.

    1964년 김종영은 처음으로 『자각상』을 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자화상도 그리고 본인이 작업을 통해 이르고자 했던 경지를 한마디로 축약한 ‘遊戱三昧 유희삼매’를 처음으로 스케치북에 난초를 그린 그림과 함께 붓글씨로 썼다. 이후 그는 같은 제목의 산문도 썼으며, 특히 유고집 『초월과 창조를 향하여』에 실린 주옥같은 단상들 대부분을 50대에 썼다.

    김종영은 부인 이효영의 헌신적인 내조로 작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집 마당에서 작업했으므로, 낮에 풀리지 않은 작품은 늦은 밤에도 나가 살폈다. 추운 겨울에는 언 손을 녹여가며 돌을 깎았다. 또한 집 주변 풍경도 즐겨 그렸다. 그는 자녀들에게 종종 “환경을 탓하고 소재를 탓하는 예술가는 모자라는 예술가다. 나는 어떤 여건에서, 어떤 소재를 가지고도 내 작품을 제작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아담한 집 구석구석은 작업실이었고 작품으로 차고 넘쳤다.

    한편 1966년 8월 15일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건립되어 그는 전문위원으로 선임됐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이라 당시 건립분과위원으로 작가추천위원을 도맡은 임영방이 그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동상제작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사실적인 것은 못하네.”라며 거절했다. 그는 작가로서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는 정신적인 자유를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글 「유희삼매」를 읽어보면 헤아릴 수 있다.

    1968년 가을부터 1969년 봄까지 김종영은 유네스코 초청으로 파리와 로마로 유럽미술계를 시찰하고 왔다.

  • 1973-1982 59세-68세 작고

    김종영은 1968년부터 1972년 2월까지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71년 학장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그는 자신이 추구한 ‘불각 不刻의 미’를 가장 잘 구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두 번째 『자각상』을 제작했다. 이후 그는 1982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전 생애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제작하며, ‘불각의 미’를 성취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불각’을 단순한 역설로 오해했다. 김종영은 동양 미술이 서구미술과 비교해서 과학적 사고, 즉 논리가 부족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과하면 문제이듯이 미술이 지나치게 논리에 치중하면, 이 또한 문제가 된다고 봤다. 그는 전통 서화를 체득한 상태에서 동시대 서양미술을 동격으로 두고, 서로를 상호 비교 성찰하여 단순한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그 스스로 생명감을 가진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불각(不刻 : 인위적으로 깎지 않는다)’이다. 불각은 작가 의도는 최소화하고 사물의 본성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불각은 조각하는 ‘행위’가 아닌 작가의 ‘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는 『장자 莊子』 외편 外篇 「각의 刻意」장에서의 ‘불각’의 의미를 상기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작업에 임한 김종영은 작품제작 시 일절 남의 손을 빌리지 않았기에 작품 하나하나를 자신의 분신과 같이 대했다. 그래서 만년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조각 작품 대부분이 품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이다.

    김종영은 1975년 회갑을 맞아 조소과 동문회 주최로 생애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이듬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고, 1978년에는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정년을 앞두고 오로지 작업에만 매진하던 1979년 그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1963년 온 힘을 다해 제작한 『삼일독립선언기념탑』이 무단으로 철거된 후 삼청공원에 덮개로 싸여 방치된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크나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1980년 4월 당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하여 초대한 개인전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최초의 조각가 초대전이었다. 그러나 무단철거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안타깝게도 지병이 급격히 악화하여 그는 1982년 예순여덟에 생을 마감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이면 이 기념탑은 철거된 기념조형물 중 유일하게 복원되어 지금은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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